뜻밖의 선물
대학 신입생 시절
너무나 감명 깊게 본 영화가 있었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 잔잔히 슬퍼지는
이 영화는 언제 보아도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 여운이 너무 강했는지, 감성 충만하던 대학 신입생 때는 영화를 본 뒤 몇 달간 한석규 같은 남자를 만나 연애하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소개팅, 미팅 할 것 없이 한석규의 외모를 닮은 사람만 만나려 했었고, 심지어 영화 속 한석규가 타던 모양의 스쿠터를 탄다는 이유 만으로도 동아리 선배를 열렬히 흠모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 선배가 빨간색 스쿠터를 타고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교정을 누비는 모습이 보고 싶어 교내 광장에서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수업도 빼먹던 때가 생각납니다.^^;;;
꿈같던 대학도
졸업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 들어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하루하루 스트레스에 지쳐가던 무렵, 친구의 부탁으로
한달 정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문 배달도 하는 김밥집이었습니다. 어느 날 배달을 하던 아르바이트생이 급한 사정으로 갑작스럽게 일을 그만 두게 되었고, 갑자기 주문이 밀려버린 사장님께서 급한 마음에 저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다행이
배달 지역은 가까운 아파트 단지와 상가건물이 대부분이었고, 큰길로 나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간단한 조작법을 배우고 난 뒤에 타는 건 문제가 없었지만, 솔직히
속마음은 당장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혹여 지나다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칠 까봐 헬멧 안에 모자를 최대한
눌러쓰고 다녔습니다. ‘어차피
한달 뒤면 이 일도 그만 둘꺼니까. 취업이 되면 그전에라도 그만 둬야지.’ 첫날은 이런 마음 뿐 이었습니다. 용돈 얼마 벌자고 감수하기엔
너무 큰 창피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자 변화가 생겼습니다. 배달을 받으시는 분들이 어린 학생이 열심히라며, 보기에도 이쁘고 귀엽다고 운전 조심하라는 덕담을 꼭 한마디씩 해주셨고, 운전이
익숙해 지니까 처음의 창피함 보다 편리함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일이 빨라지니까 사장님도 좋아하셨고, 한 달이 지나 친구가 돌아온 뒤에도 계속 배달 일을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 상황을
설명 드리고 취업이 되기 전까지만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기로 해서 6개월 정도 더 일을 했습니다.
막상 그만 둘
때가 되니 아쉬운 마음이 컸습니다. 앞으로 회사를 다니면 다시 스쿠터를 탈 기회는 없을 것만 같아서
사장님께 양해를 구해 일이 끝난 뒤 스쿠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바람을 쐬었습니다. 가까운 정비
센터에 찾아가 점검도 받았습니다.
‘근데 사장님, 이 스쿠터 이름이 모에요?’ 라고 물으니 효성의 ‘슈퍼캡’이라고
알려주십니다. 6달 동안 타고 다니면서 이름을 처음 알았습니다. 간단한
정비를 마치고 세차도 손수 해주었습니다. 아마 생김새도 이날 처음 자세히 본 것 같습니다. 가만 보니 어디선가 본듯한 익숙함이 있었습니다. ‘어라?’ 갑자기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허겁지겁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몇 년전 그렇게 감동 깊게 보았던 영화 속 한석규가
타고 나왔던 그 스쿠터가 이 녀석인줄 그만둘 때가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왠지 아주 깊은 인연인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빨간 스쿠터 ‘수퍼캡’과는 그렇게 작별했습니다.
정신 없이 바쁜
직장생활 속에 그때의 기억은 기분 좋은 추억으로만 남는 듯 했지만, 결국 저는 지금도 스쿠터를 타고
있습니다. 자가용을 고려하다 기름값 부담 때문에 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센터를 찾아가 추천 부탁 드렸더니
마침 새로 들여온 티니110을 권해 주시네요. 아담한 사이즈와
귀여운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연비도 좋다는 말씀에 결국 그날 계약을 해버렸죠. 덕분에 아침 출근길 상쾌함이 여전히 기분 좋습니다. 그때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도 만원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갑갑해 하고 있었겠지만(요즘은 비 때문에 거의 못 타서
갑갑하지만…ㅠㅠ), 운명 같았던 6개월의 라이딩(?) 경험은 제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물했습니다. 마치 영화 제목처럼 한여름에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이 선물은 제 곁에서 오랫동안 즐겁고 편리한 발이 되어줄 것 같습니다.